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실존주의] 실존 속의 주체와 자유

Ⅰ. 실존이란 무엇인가?

Ⅱ. <고도를 기다리며> 인간은 실존하는가?
1. <고도를 기다리며> 줄거리
2. <고도를 기다리며> 설명
3. 작품 속에 드러난 실존주의

Ⅲ. 실존 속에서 자유의 의미
1. 자유를 향한 투쟁
2. 현대사회에서의 구속
3. 주체를 찾아

Ⅳ. 대학생은 실존하는가?
1. 자유로부터의 도피
2. 대중이 돼버린 주체

Ⅴ. 주체의 실존

Ⅵ. 사회적 실존 - 시민사회
1. 헤겔
2. 하버마스
실존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이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가 실존이라고 믿고 있는 삶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삶을 카뮈는 부조리로 보았고,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한 존재로, 샤르트르는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로 보았다. 실존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개념으로 인간 존재를 규정하고 각기 다른 설명 방식으로 실존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실존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설명하려는 그들 스스로도 불완전한 존재였기 때문에, 언어와 이성으로써 설명 가능한 완벽한 무엇, 즉 진리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실존 철학의 원류로 일컬어지는 니체는 바로 이런 물음에서 시작한다. 즉,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 큰 회의를 품게된다. 그리고 세상에 진리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 가능한 신도 이미 죽었다. 즉, <~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애초부터 모순적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란 무엇이다>의 형식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주어 속에 술어의 개념이 이미 포함된 동어 반복일 뿐이란 얘기다. 예를 들어, <사랑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했을때, <사랑은 아끼고 위하여 정성과 힘을 다하는 마음, 혹은 이성에 끌리어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이다>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결국 동어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주어 속에 이미 술어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내리는 것은 무의미 하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질문은 <누가, 왜 진리를 묻는가, 어떻게 진리가 되는가>가 돼야 한다. 진리는 플라톤 이후 철학사를 지배해온 궁극적 지향점이었다. 그러나 진리란 무엇인가를 찾는 기존의 철학적 태도는 잘못된 것이었다. 니체는 그렇게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절대적 물음을 거부한다. 대신 그 물음을 던지는 주체, 인간의 의지에 대해 고민한다. 니체의 이런 주체에 대한 강조는 실존주의에 이르러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배태시켰다. 그러므로, 실존주의 철학에선 애초부터 <실존은 무엇이다>는 형식의 질문은 없다. 대신 누구의 실존이며, 왜 실존인가, 어떻게 실존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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