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Ⅰ. 신군부의 등장과 12.12 사태
Ⅱ. 5.18 광주 민주화 운동
Ⅲ. 제 5공화국의 정치
Ⅳ. 제 5공화국의 경제
Ⅴ. 제 5공화국의 외교·남북 관계
Ⅵ. 제 5공화국의 언론 장악과 우민화 정책
Ⅶ. 인권·민주화 탄압
Ⅷ,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
3. 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로 인해 유신체제가 종식됨으로써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절대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다수의 국민은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고 민주화의 갈망은 확대되었다. 5․17 군사 쿠데타 전까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민주화의 물결은 봇물 터지듯이 솟구쳤다. 군사 정권 하에서 연금, 투옥 등으로 제도정치권에서 통상적인 정치화동을 제약 당했던 정치인들도 1980년 초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와 공화당 총재로 취임한 김종필 등의 정치권은 일단 최규하 과도정부를 인정하고, 유신헌법의 폐기 및 신헌법 제정을 통해 민주화일정에 따른 조속한 정권이양의 실시를 촉구했다. 그간 군사정권하에서 침묵을 강요당한 지식인들도 변화하는 현실에 동참했다. 1980년 4월 24일 발표된 대학교수들의 지식인선언은 기존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철회와 새로운 민주질서 이행을 촉구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군사독재 치하에서 치열하게 민주화투쟁을 해 온 학생운동 세력과 군사정권하에서 최소한의 인간대접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폭발적 욕구의 분출이었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소재한 사북탄광에서는 탄광노조 지도부의 어용성과 지방경찰의 비호에 대한 저항으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포함된 시위군중이 경찰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하고 면사무소를 점거하는 충격적인 파업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쟁의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민주화 세력이 총체적인 역량을 규합하기에는 너무도 짧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서울의 봄’ 당시 가장 강력한 결집세력이었던 대학생들이 급변하는 사태의 와중에서 학생운동 지도부의 미숙한 경험과 인식의 한계로 나타난 ‘서울역 회군’사건 이후 신군부에 저항할 수 있는 조직화된 세력 혹은 집단적 역량은 실질적으로 부재한 상태였다. 그 결과 기나긴 암흑기에서 깨어난 민주화의 열망은 신군부에 의한 5․17쿠데타로 인해 강제적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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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사] 신군부와 제5공화국(1980~198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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